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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장/훈녀생정

[재가공일기] 내 속도에 맞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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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공일기

작성날짜: 201210

 

우리 가족은 밥을 빨리 먹는 편이다.

나는 항상 뒤쳐져서 뒷처리를 담당하곤 했다.

나는 달리기도 느리고, 무엇 하나 빨리 익히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덕분에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지고, 남들을 따라 잡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잰걸음으로나마 쉬지않고 달리던 내가 요즘에는 유튜브 대신 책을 찾게되었다.

성격 급한 조바심쟁이가 유튜브 특유의 빠른 속도에 결국 뒤쳐지고 만 것일까.

하지만 이상하게 이제야 내 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책을 펼쳐들면 두툼한 솜이불을 들쳐 그 속에 요새를 차린 것 같은 기분이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내 속도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나는 인터넷 강의를 들을 때 꼭 속도를 배속해서 재생한다.

그리고 빠르게 필기한다.

매분매초가 날 채찍질하는 기분이 든다.

남들보다 더 빠르게 강의를 듣고, 쓰고, 암기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

그렇게 빨리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동영상은 자기 혼자 좋을대로 떠들며 흘러가버린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는 다르다.

머릿속으로 활자를 받아들이는데 정해진 속도는 없다.

나는 빠르게 읽고 싶을 때는 빠르게, 천천히 읽고 싶을 때는 한 문장을 온종일 생각하기도 한다.

책은 동영상보다 친절하다.

 

누구였지, 아인슈타인이었나?

아무튼 저명한 누군가가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시간이 빨리 흐르고, 싫어하는 일을 할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격하게 동의한다.

 

나는 매분매초 다르다.

나는 그때그때 다른 생각과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변하고 있다는 증거다.

매분매초 변하고 있는 내 기분과 생각에 맞추기에 책처럼 친절한 매체는 없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나는 자주 책을 읽다가 집중력이 흐트러지곤 한다.

그럴때엔 그냥 멍을 때려버린다. (그렇기에 절대 다독가는 아니다)

그러다보면 읽던 부분을 또 읽기도 하고, 귀찮아지면 몇장을 훌쩍 넘겨버리기도 한다.

마음이 조급할 때엔 읽고싶은 단어나 문장만 골라 읽기도 한다.

그렇게 반복되거나 비유기적으로 흘러가는 내용을 그냥 받아들인다.

그럼 더더욱 내 마음대로 책의 내용을 해석하게 된다.

해석은 대체로 그 당시 나의 기분을 크게 반영한다.

그래서 책은 읽을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남들도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조잡한 책읽기 방식도 독서라고 쳐준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로지 내 속도만을 중점으로 두기 때문이다.

내 속도란 즉, 내가 살아가는 속도이다.

그 속도는 느릴 때도 있고, 빠를 때도 있다. 상당히 유동적이다.

하지만 느리건 빠르건 남들에게 맞추기만 할 필요는 없다.

결국 내가 내 속도를 찾지 못하면 더 일찍 지칠 뿐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간다.

그래도 괜찮다. 다시 일어나서 내 속도를 찾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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